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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에 영감을 받은 고래잡이 그림 `할라잇` (116.8×91㎝). [사진 제공 = 선화랑] 어스름이 짙은 검푸른 바다에 고래가 솟구친다. 짐승 뼈와 고래 내장으로 만든 카누에서 작살을 든 사람들이 달려든다. 생과 사가 엇갈리는 찰나를 그렸다. '할라잇(Halaayt)'이란 제목은 '신의 강령'을 뜻하는 이누이트어다. 고대 이누이트족에게 바닷속 동물은 단순히 사냥의 대상이 아닌 숭배의 대상이었다. 고래잡이는 조상신께 자신들의 생존을 의탁하는 신앙이었다. 목숨 걸고 잡은 고래 한 마리로 공동체는 8개월의 겨울을 버텼다. 여든의 노화가는 이 뜨거운 풍경을 매일 새벽 그린다."고래를 그리기 시작한 게 4년 전이야. 이제 실증도 나는데 사람들이 박수를 치니 그만둘 수가 없어."
'인사동 터줏대감' 선화랑이 45주년을 맞아 곽훈(81·사진) 개인전을 연다.7월 9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작가의 40여 년 작업 세계를 망라하는 50여 점의 작품이 걸렸다. 최신작 '할라잇'을 비롯해 1980~1990년대 대표 연작인 '기(氣)' '겁(劫)' 시리즈도 걸렸다.개관 45주년 전시의 주인공이 된 곽훈은 2011년 작고한 선대 김창실 회장이 가장 아꼈던 전속 작가였다. 원혜경 대표는 "34년 동안 화랑을 운영하셨는데 그 기간 중에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열정을 다하신 작가가 곽훈이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이화여고에서 미술교사를 하다가 1975년 빈손으로 아내와 도미했다. 밥벌이가 급해서 클리블랜드 광고회사에서 박람회 전시디자인을 해 5년을 먹고살았다. 4·19 직후 흉흉했던 캠퍼스에선 전통 회화를 배워본 적이 없다. 일하면서 많은 재료로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월급의 힘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기계적으로 일하는 능률주의를 배웠다.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1시간 산보를 하고, 오전 7시부터 낮 12시까지 일을 하고 끝낸다"고 말했다.돈을 모아서 예술가의 도시인 뉴욕 소호(SOHO)로 가려고 차로 출발했는데 켄터키에서 갈림길을 만났다. 동서로 길이 나뉘는데 뉴욕행 좌회전 대신 우회전을 택해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아들을 데리고 뉴욕에서 살 자신이 없었다.로스앤젤레스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간 그는 1981년 조신 양코 LA 시립 반스달미술관장의 눈에 들었다. 신인전에 에릭 시걸, 레디 존딜 등과 발탁되며 '벼락 스타'가 된 것이다. 한국으로 역수입돼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 개관전에도 출품됐다.초기 작업에선 고향의 물건이던 도자기, 가야 토기 등을 추상화 속에 담곤 했다. 한(恨)과 샤머니즘은 평생을 천착한 주제다. 한국으로 돌아와 4년 전부터 이천 작업실에 칩거하며 작가는 30년 전 알래스카 여행에서 만난 고래를 그리고 있다. 바닷가엔 소금을 먹은 하얀 고래 뼈가 쌓여 있었다. 그걸 가져다 설치 작업에 썼다. 10년 전 울산에서 만난 반구대 암각화의 충격이 고래잡이 그림을 탄생시켰다. "태화강을 거슬러 오른 거대한 고래를 고대인들이 잡고, 암각화로 남기는 모습을 상상해봐. 얼마나 대단해. 고래를 본 적이 없어 드로잉을 시작했는데 200장을 그리고 나니, 단단한 육체를 가진 고래를 캔버스에 잡아 넣을 수 있게 됐어."매일 새벽 고래를 잡으러 붓을 드는 일상에 지치지 않을까. "화가는 일하는 재미로 사는 거야. 새 아이디어가 생겼는데 그걸 안 그리면 보물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지. 이제까지 곽훈의 전람회에서 진면목을 보여준 적이 없었어. 이번 전시를 보고 제일 놀란 건 나야. 사십 년 전 그림이 엊그제 그린 거 같아서 흥분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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